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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프로그레시브 락의 사회학(A Sociology of Progressive Rock)

translated by Kim Seong Woo, libero (swkim@gaia.kaist.ac.kr)

1. 뮤지션들
2. 팬들
3. 고급 문화의 전복(顚覆) : 기보(記譜) 대 즉흥

Pink Floyd의 지도적인 사람들은 "노동자 계층 영웅들"이라고 결코 주제 넘게 자처할 수 없었다(또는 하지 않았다). 그들의 배경은 부모들이 전적으 로 구별된, 엄밀한 화이트칼라였다.[원주 1]

The leading lights of Pink Floyd never could (or did) pretend to be "Working-class heroes." Their backgrounds were strictly white- collar, their parents downright distinguished.

그들의 사회적 배경의 견지에서, Pink Floyd의 멤버들은 영국 프로그레시 브 락 뮤지션들 모두의 공정한 대표자들이었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결코 노 동자 계층 스타일이 아니었고,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결코 노동자 계 층의 영웅들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 특히, 초기 스테이지에서 - 프로그레시브 락은 보헤미안적인, 지식인 중류 계층의 생생한 표현이었다.
프로그레시브 락 형성에 대한 칼리지, 종합대학, 그리고 성공회 교회들의 기여를 고려해서, 이 스타일이 어떻게 지성적인, 영국 남동부의 젊은이들을 바탕으로 한 소문화에서의 근원을 완전하게 반영하는지를 보일 것이다. 사 실 논의하겠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는 거의 발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은 미국에서의 대중적인 상업성의 승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궁극적인 성공의 일부분만을 얻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장의 실질적인 부분은 본래의 청중인 영국 히피들 뿐만이 아니라 1970년 대 초반과 중반 사이에 실질적인 상업적인 사건을 만들었던 거대한 젊은이 들 바탕의 미국 대중들에 의한 프로그레시브 락의 수용을 조사하는 데 쓰여 진다. 또한, 그것의 작곡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프로그레시브 락의 클래시컬 /록 퓨전의 사회적 중요성을 고려할 것이다. 작곡 방식들이란, 아프리칸-아 메리칸 음악의 자발성과 개인적인 표현의 허용과 유럽 고전 음악의 대규모 의 조직과 확장의 잠재성을 통합한 것이다.

1. 뮤지션들

(The Musicians)

대다수의 대중 음악 연구들은 음악학적이라기보다는 더욱 사회학적으로 편중되고, 특정 스타일들을 거의 청중들의 인구 통계적인 평가를 통해 분류 하고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접근법의 유효성에 의문을 가지지는 않으며, 심지어 본인도 그것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주어진 음악적 스타일의 사회적 중요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구이며, 소문화적인 표현으로서의 대중 음악에 대한 많은 주요한 연구들의 중심 요소였다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음악인 자신들의 배경들이 너무 자주 무시되는 경향을 느낀다. 이것은 음악 인들은 그저 사회적인 장력들의 수동적인 선로(線路)들이라는 대중 음악의 많은 사회학적 연구들의 토대가 되는 전제(잘못된 것으로 느낀다)로부터 나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국과 미국의 청중들에 의한 프로그레시브 락 의 수용을 조사하기 전에, 음악인들에 대한 통계학적인 평가를 수행할 것이 다. 이것은 이 스타일의 형성기 동안 음악인들과 청중들이 공통적인 사회적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고 믿는다. 프로그레시브 락의 사회적 근원들 - 영국 남부에서의 출현, 대학들과 성공회 교회들과 같은 중류층 재 단들과 굳게 결속된 것 - 을 조명하는 것은 그것의 궁극적인 문화적 중요성 을 명확히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David Hackett Fischer는 원조격인 연구인 Albion's Seed:Four British Folkways in America에서, 잉글랜드에서의 네 개의 분명한 문화적인 지역들 을 인정한다. 첫째는 잉글랜드 동부 지방인데, Norfolk로부터 남쪽으로 Essex까지 뻗쳐 있고, Cambridgeshire와 Lincolnshire를 포함한다. 둘째는 Kent로부터 서쪽으로 Dorset과 북쪽으로 Warwichshire까지의 지역을 가진 잉글랜드 남부 지방이다. 세번째 지방은 중북부 지역인데, Cheshire와 Derbyshire로부터 북쪽으로 Yorkshire를 통한 지역의 넓은 지대를 포함한다.
네번째 지방인 경계 지방은 스코틀랜드 경계를 따라 잉글랜드의 최북단 주 (洲, county)들을 갖는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주로 잉글랜드 남부에서의 현상이었다. 1970년대의 주요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의 대다수는 (1980년대의 유명한 네오-프로 그레시브 밴드들의 대부분처럼) 여기에서 결성되었다. 많은 주요한 프로그 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이 지역에서 (대체로 1942년과 1950년 사이에) 태어 났고, 심지어 대영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서 출생했던 뮤지션들도 종종 여기 서 자랐다. Yes와 Genesis 같은 밴드의 멤버들은 거의 London/Kent/Surrey 지역 출신이다. King Crimson과 Gentle Giant는 각각 Bournemouth와 Ports mouth 출신들인 남부해안 밴드들이다. Pink Floyd는 런던과 오래된 대학 도 시 Cambridge 로부터의 멤버들을 가진다. 모든 캔터베리 스쿨은 켄트 주에 있는, 잉글랜드의 가장 고색 창연하고 역사적인 도시들 중 하나로부터 연유 된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주요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 중에, 오직 the Moody Blues(산업적인 중부지역의 Birmingham에 거점을 두었다)와 Jethro Tull(북서 해안의 Blackpool에서 결성되었다)만이 잉글랜드 남동부 외부 지역 출신이다.

하지만, 심지어 이 지역 외부에서 결성된 그런 밴드들도, 이 지역이 1960 년대 후반 동안 영국 반항문화의 중심이었으므로, 런던과 그 주변에서 끝마 쳤다. 이들 많은 그룹은 이 시기 동안 중요한 반항 문화의 출몰지였던 UFO 클럽, the Middle Earth(역주, J.R.R. Tolkien 문학에서 배경이 되는 환상 세계인 중간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Marquee 같은 런던의 몇몇 특정 클럽들 에서부터, 그들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967년에 누구나 UFO 클 럽에서 Pink Floyd, Soft Machine, 그리고 Procol Harum의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같은 해 동안, Pink Floyd와 the Nice는 Yes가 1969년 내내 연주했 었던 클럽인 Marquee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였다.[원주 2] 물론, 이들 클 럽에서 연주한 많은 밴드들은 실질적인 상업적 성공을 얻기 전에 날개를 접 었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밴드들도 결국은 더 유명한 프로그레시브 락 그 룹들로 들어간 멤버들을 종종 가졌었다. 예를 들면, 1967년에 UFO 클럽에서 자주 공연했던 그룹인 The Crazy World of Arthur Brown에는 나중에 ELP의 드러머였던 Carl Palmer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시에, 같은 클럽에서 공연했 던 밴드 Tomorrow에는 나중에 Yes에 속했던 Steve Howe가 들어가 있었다.
1960년대의 끝에, 런던 외부의 어떤 클럽들은 또한 중요한 반항문화의 출몰 지였다. 예를 들면, 1969년과 1970년에는 나중에 프로그레시브 락의 "제 2 의 물결(second wave)"의 일부분으로 탁월함을 얻은 수많은 밴드들 - King Crimson, Van der Graaf Generator, Genesis, Renaissance - 이 Oxford 근처의 Aylesbury에 있는 Friars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을 누구나 볼 수 있 었다.

1960년대 말에도, 오직 클럽만이 초기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의 유일한 공연 장소는 아니었다. 많은 이들 밴드들은 또한 Royal Albert Hall, the Rainbow Theater, 그리고 개조된 무도장인 the Lyceum과 같은 런던의 다소 더 큰 장소에서 공연했다. 수많은 공연들을 주연으로 한 야외 페스티발들은 또한 인정받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ELP는 1970년 8월에 Isle of Wight 페스티발에서의 공연 결과로 스타덤에 올랐고, 반면에 1968년에 시작된 Hyde Park에서의 무료 콘써트들은 King Crimsom과 Jethro Tull에게 갑작스런 유명함을 가져왔다.[원주 3] 중간 크기의 장소와 야외 페스티발들 은 둘 다 1970년대 내내 가능한 공연 모임들을 유지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클럽 순회는 가능한 장소 제공의 원천으로서의 중요성을 급격히 쇠퇴 시켰다. 주요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은 광장과 스타디움(점차로 영국보 다는 오히려 미국에서)으로 이동했고, 뮤지션들과 그들을 발생시킨 소문화 적인 환경들과의 틈은 넓어지기 시작했다.

전성기 동안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 운동에 참여했던 잉글랜드 외부로부터 온 뮤지션들은 대단히 드물었다. 유럽 대륙에서 태어난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 씬의 유일한 주요 참여자는 스위스 키보디스트 Patrick Moraz였고, 사실 상 미국 뮤지션들은 1970년대 말까지 영국 씬에 참여하지 않았다. Moraz가 Yes와의 단 하나의 앨범을 위해 계속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멤버 들은 외국인으로서, 그가 그들 음악의 정수를 정말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믿 었다.[원주 4]

정말로,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이 그러한 명확하게 한정된 음체계(sonic code)를 발전시킨 이유 중 하나는 이들 뮤지션들이 그들 사이에 조합을 결 성한 것 같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적어도 두 개의 주 요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에서 연주했다. 어떤 이는 셋 또는 네 밴드들 에서 연주했고, Bill Bruford는 1970년대 말의 자신이 창설한 퓨전 밴드를 세지 않더라도, 다섯 밴드들(Yes, King Crimson, National Health, Genesis, 그리고 U.K.)에서 연주했다. 또한 밴드 멤버들은 다른 그룹들의 앨범들에서 게스트 아티스트로 종종 참여했다. 예를 들면, Yes의 Jon Anderson은 King Crimson의 Lizard 앨범의 일부분에 참여했고, King Crimson의 Robert Fripp 은 Van der Graaf Generator의 H to He Who Am the Only One과 Pawn Hearts 에서 게스트 기타리스트로 참여했다. 또한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이 서 로의 솔로 앨범들에 참여하는 것도 매우 흔히 일어났다. 캔터베리 락 씬은 심포닉 프로그레시브 락 씬보다 조금은 더 단단한 "조합(guild)"을 나타냈 었지만, (6장에서 보였듯이) 이들 두 "스쿨들"의 뮤지션들 사이의 상호간의 많은 영향이 있었다.

왜 프로그레시브 락이 영국의 다른 곳 또는, 그런 이유로, 미국보다는 잉 글랜드 남부에서 발전되었을까? 그 대답은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역사 적, 그리고 사회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견을 제기한다. 무엇보다도, 잉글랜드의 중부와 북부가 한층 노동자 계층과 블루칼라인 반면, 잉글랜드 의 남부와 동부는 더 한층 전문적이고 화이트칼라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이 다.[원주 5] 명백하게도, 고전 음악 뿐만 아니라, 고급 문화의 예술과 문학 에 대한 관계를 갖는 프로그레시브 락과 같은 스타일은 노동자 계층 환경으 로부터 나오지는 않았다. 그 출현은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 사람들의 소문 화에 의지했다.

더구나, 잉글랜드 남부를 프로그레시브 락의 합당한 출생지로 만들었던 적어도 두 가지 활동적인 문화적 요소들이 있다. Fischer가 Albion's Seed 에서 지적했듯이,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잉글랜드의 지역들 중 가장 견고한 성공회 지역이었고, 사회적 계층들간의 구분이 가장 공개적인 지역이었다.
[원주 6] 아래에서 보이겠지만, 이 지역의 성공회 교회에 의한 길게 투영된 흔적은 음악적 스타일로서 프로그레시브 락의 발전에 진정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지역의 전통적인 계층 구분들은 증류층 젊은이들의 교육에서 고급 문화로의 강한 노출을 강요했다. 초기 영국 락 뮤지션들(예로, Beatles, Rolling Stones, Who의 멤버들)의 가중 중요한 교육 제도는 아트 스쿨이었 는데, 이는 노동자 계층의 학생들이 노동자 계층의 미래를 탈출하도록 돕도 록 계획된 제도였다.[원주 7] 아트 스쿨을 다닌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 은 별로 없고,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오히려 얼마나 많은 이들 밴드들이 더 높은 학문 단체에서 결성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를 통하여, 칼리지와 종합 대학 캠퍼스들은 영 국 프로그레시브 락을 위한 창조적인 솥(cauldron, 역주: 배출장소나 모인 곳으로서의 의미?)으로서 제공되는 데 있어서,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했 다. Van der Graaf Generator는 Manchester University에서 결성되었다.
Henry Cow는 Cambridge University에서 연합하였다. Pink Floyd는 Regent Street Polytechnic의 건축학 학생들의 단체에 의해 결성되었다. Genesis는 입학이 까다로운 Charterhouse 공립 학교를 같이 나왔다. 그리고, King Crimson의 유력한 1972-74년 라인업을 함께 세웠던 Robert Fripp과 John Wetton은 Bournemouth College에서 만났다. Ian McDonald는 1960년대 말의 캔터베리 언더그라운드의 높은 학식의 본성을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매우 목가적이었습니다. 새로운 재즈 앨범들-Mingus, Coleman, Monk와 Taylor - 을 듣거나, 당시의 주류들(Luigi Nono, Stock hausen), 화가(Mark Rothko, Jackson Pollock), 그리고 작가(Burroughs와 비트족들)에 열광하기 위해, 서로의 집들(그러나 대체로 Robert [Wyatt] 의 어머님이 소유한 방 15개의 조오지안 맨션에서 모임)을 방문하는 것이 었죠.[원주 8]

물론, 노동자 계층 배경을 출신으로 한 몇몇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이 있다. 우주적인 독백의 프로그레시브 락 대가인 Yes의 Jon Anderson은 잉글 랜드 북부의 석탄 광산 도시에서 자랐다.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 들 대다수는 어떤 류의 2차 이상의 교육이 예상되는 가정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이들 뮤지션들이 사실상 그들의 칼리지 또는 종합대학 교육을 마친 이는 별로 없다. 반항 문화의 일원으로써, 그들은 락 뮤지션으로서 경력을 추구하는 것이 "곧은" 사회의 월급쟁이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확 실하고 궁극적으로 "명예로운"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멤버들이 결코 졸업하지 못한 앞서 언급된 모든 그룹들에 덧붙이면, Bill Bruford는 Leeds University를 그만두었다. Tony Banks(Genesis)는 Sussex University를 포 기했다. Tony Kaye와 Rick Wakeman(Yes의 다른 모습들에서의 키보디스트들)
은, Francis Monkman(Curved Air)이 그랬듯이, Royal Academy of Music을 각각의 다른 학과 과정 단계에서 그만두었다. Steve Hillage(Gong)는 일년 후에 Kent University를 떠났다. 그리고, Matthew Fisher(Procol Harum)는 Guildhall School of Music을 떠났다. 그러나, 몇몇은 사실상 졸업했다.
Gentle Giant의 Kerry Minnear는 Royal Academy of Music에서 작곡 분야에 서 학위를 받았다. Karl Jenkins(Soft Machine)는 University College, Cardiff에서 음악 학사 학위를 받았다. Patrick Moraz는 Geneva University 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았다. 또, Mike Ratledge는 Oxford University에서 철학과 심리학에서 명예 학위를 얻었다.

한 그룹으로서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의 교육적인 배경들은 그들 이 유럽 고전 음악 레파토리에 익숙한 것을 설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으며, 이러한 배경들 없이 프로그레시브 락은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계층 배경과 - 고전 음악은 미국보다 영국 중류층 의 생활에 항상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그들이 자주 받았던 고전 음악의 상당한 훈련 때문에, 그 음악에 익숙하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음악 학교 에 가지 않은 사람들도 종종 수년 동안 개인적으로 또는 잘 알려진 교사들 로부터 공부했다. ELP의 Greg Lake가 언급했듯이, 이들 뮤지션들이 유럽 고전음악적인 유산을 끌어내는 것은 미국 대중 뮤지션들이 자신들 출생지의 블루스, 재즈, 그리고 가스펠 유산들을 끌어내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원주 9]

확실히, 영국 락 뮤지션들은 아프리칸-아메리칸 재즈와 블루스 뮤지션들 에 깊은 존경심을 가졌다. Dick Heckstall-Smith(Graham Bond Organization 과 나중에 원조격인 재즈락 그룹 Colosseum의 섹소폰주자)는 말하기를, 1960년대의 영국 대중 뮤지션들이 "결국 흑인이 되기를 원했었다. 그 결과 로 그들은 그들에게 열려진 단지 그 길을 떠났고, 흑인 음악을 연주하려고 했다....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나의 삶을 통하여 나에게 필적하며 내가 흑 인처럼 연주한다고 말하는 찬사를 표하는 사람들-대개 백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항상은 아니다-을 가졌다.... 대체로 나는 그것을 의미하는 바대 로, 단순한 높은 찬사로 생각한다"라고 하였다.[원주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Rolling Stones는 아마도 어떤 그들 자신의 문화적 유산을 그들의 음악으로 끌어내려고 자아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은 1960년 대의 마지막 주요한 영국 밴드였다. 양육과 계층적 배경에 의해 고전 음악 에 익숙해진 그런 뮤지션들에게는, 프로그레시브 락 스타일의 클래시컬/락 퓨전은 완전한 문화적인 의미를 만들었다. 그래서 John Wetton은 말하기를,

저는 기본적으로 유럽인이고, 저의 배경은 스스로 매우 기하학적인 고전 음악으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영국에서 운이 좋은 것은 두 대륙 사이에 서 있다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미국 R&B 블루스 음악 류의 영향을 받고 또한 반면에 수천년의 고전 음악을 가집니다. 그리고, Beatles가 나 타났고- 그들은 그 둘을 하나로 녹였죠. 그들은 매우 단순하고 쉬운 미국 R&B를 받아들여, 유럽 멜로디와 화음들을 그 위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건 환상적이었죠. 모든 60년대 후반 밴드들은 Beatles를 정말로 뒤따랐죠.
그들은 Beatles가 하고 있었던 것을 그저 확장했습니다. Pink Floyd, Yes, Genesis를 들 수 있죠. 그들은 약간 더 무거웠으나, 그 취향은 미국 청중 의 것이었습니다.[원주 11]

Keith Emerson은 그의 음악에서 아프리칸-아메리칸 그리고 유럽의 근원들 모두의 영향을 인정하는 데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영국 락앤롤은 미국 흑인 소울 음악으로부터 탄생되었고, Beatles는 처음 그들의 스타일에 그것을 사용하였습니다. 저의 관심은 또한, 매우 초기에 는, 많은 블루 노트 레코딩들, Miles Davis를 들으며 마음속을 맴돌았습 니다. 저는 유럽의 영향들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러한 곡들을 강화 시키려고 즉흥성을 가진 재즈의 사고 방식을 사용했습니다.[원주 12]

프로그레시브 락 스타일의 형성에서 또다른 강력한 문화적인 힘은 성공회 교회였다. 누구나 왜 프로그레시브 락 스타일이 미국보다는 오히려 잉글랜 드에서 일어났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 쟝르에서 발휘된 성공회 의 전통 합창의 분명한 영향력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많은 프 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젊었을 때 성공회 교회를 다녔다. 그들 중 몇몇 은 교회 뮤지션으로 봉사했다. John Wetton은 그의 첫번째 음악적인 경험은 합창단 지휘자이며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의 형을 도와주는 것이었다고 말 했다.[원주 13] Yes의 베이스주자이며 백킹 보컬리스트인 Chris Squire는 Barry Rose의 지휘 하에 St. Andrew의 성당 합창단에서 소년단원이었다.[원 주 14] 1975년까지 Genesis의 주 보컬리스트였던 Peter Gabriel은 또한 10 대에 합창단 소년단원이었다.[원주 15] Patrick Moraz는 잉글랜드에 도착한 후, Bournemouth 지방의 한 교회에서 오르간주자로 일했다.[원주 16] Soft Machine의 Mike Ratledge는 캔터베리 대성당의 오르간주자와 같이 오르간을 공부했다.[원주 17] King Crimson의 Robert Fripp은 성공회 합창 음악, 특 히 17세기 작곡가 Orlando Gibbons의 성가들을 주된 영향으로 인용했다.[원 주 18] Keith Emerson은 인터뷰들에서 또한 성공회 배경에 대해 비췄다.[원 주 19] Peter Hammill은 그가 성공회 배경보다는 카톨릭 출신(그는 어릴때 예수교 공립 학교를 다녔다)이라는 점에서 더욱 신기하지만, 그 또한 성공 회와 카톨릭 교회 모두를 위해 음악을 작곡했던 Thomas Tallis와 같은 영국 르네상스 대가들의 합창 음악에 영향받고 있다고 시인했다.[원주 20]

Jim Curtis는 미국 리듬앤블루스가 흑인 가스펠 음악을 세속화한 것과 상 당히 같은 방법으로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이 성공회(그리고 아마도 카톨릭)
교회음악의 세속화를 보였다고까지 말하였다.[원주 21] 이러한 제시는 약간 문제를 확대하는 반면에 - 흑인과 백인 성령 강림 교회들이 미국 R&B 뮤지 션들의 세계관을 구성한 정도까지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의 세계관은 성공회 교회에 의해 구성된 것 같지는 않다[원주 22]-, 성공회 예배식 경험이 많은 미래의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에게 깊고 지속적인 감명을 주었다는 것을 의심할 바 없다. Chris Squire는 "내가 그것[St. Andrew's에서 합창단 소년 단원으로 활동한 것]으로부터 얻은 음악의 실제적인 이해와 그로 향한 정신 적인 느낌은 그것이 나와 함께 머무른 어떤 것이었다"라고 말하였다. [원주 23] Peter Gabriel은 "찬송은 Charterhouse에서 유일한 음악적인 순간이 되 곤 했다. 채플에서 오르간은 장대했고 연주는 굉장했고...훌륭했다. 모든 사람은 일어나서 소리질렀을 것이다. 흑인 영가만큼 감동되었을 것이다. 그 것은 정말 감정을 유발시켰고,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의 꼭대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채플을 나왔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원주 24] Peter Hammill 은 또한 교회의 종교적 의식감에 의해 영향받는다는 것을 인정했다.[원주 2 5] 프로그레시브 락의 어떤 가장 주목할만한 점들-선법적 화성, "파이프 오 르간적" 울림들과 준합창적인 보컬 편곡에의 강조, 순수한 두성조(頭聲調, head tone)들과 조율된 창법의 선호- 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성공회 교회 음악의 영향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하지 않다.

James Lincoln Collier은, 재즈의 역사에 대한 그의 조사에서, 대중 음악 의 한 쟝르가 노동자 계층의 흑인 뮤지션들로부터 탄생하고, 결과적으로 백 인 사회에서의 어느 정도의 지위에 도달하고, 그리고 중류층이며, 대학교육 을 받은 뮤지션들의 관심을 끌게 되는 유형을 적었다. 바꿔 말하면, 이들 뮤지션들은 자의식적으로 유럽 고전음악적 전통의 구조적인, 그리고 음색적 인 요소들을 그 음악으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 여기서는, 1940년대의 Stan Kenton과 Woody Herman의 "심포닉 재즈"와 1950년대의 Dave Brubeck, Lennie Tristano, 그리고 Modern Jazz Quartet의 쿨 재즈이다.[원주 26] 프 로그레시브 락이 락 음악의 전체 역사의 부분으로 보여진다면, 락의 지성화 와 "고전화(classicalization)"에 대한 쿨 재즈의 매우 비슷한 역할을 충족 시키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더구나, 더욱 "지성적인" 재즈 스타일들은 프로그레시브 락이 수년 뒤에 수행하게 되는 역할과 매우 비슷한 소문화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David Riesman이 지적했듯이, 평균적인 사회적 시각보다 더 자유로웠던 교육받은 백인 남성으로 거의 구성된 더 복잡한 재즈 스타일들을 둘러싼 소문화는, 체제 승인된 팝 문화로 경멸적으로 간주되며, 체제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서 그 음악의 밀폐적이고 배제적인 요소 뒤에서 집결된다.[원주 27] 여기서 프로그레시브 락을 둘러싸고 있는 히피 이후의 소문화들과의 유사점들이 두 드러지지만,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아마 누구나 대중 음악의 미래 스타일들이 또 이런 형태의 "고전화"를 치 를 것인지를 궁금해할런지 모른다.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는 쪽이다. 고전 음악은 1960년대 초반 이래로 대중성에서 지속적인 감퇴를 겪고 있었다. 19 40년대와 50년대 동안에 교육받은 재즈 뮤지션들에 의한 재즈와 고전 음악 을 융합시키려는 시도들은 -그래서 그들 부모들의 고급 문화와 그들 시대의 대중 문화 사이의 융합에 영향을 끼쳤다 - 고전적인 전통들이 고급 문화의 상징으로서 여전히 전력을 보유했을 때에 일어났다.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이 1960년대 말에 락과 고전음악적인 주제들을 융합하려는 실험 들을 시작했을 때에도, 고전 음악은 여전히 상당한 문화적 반향을 가졌다.
하지만, 싸이키델리아의 출현 이래로 25년 이상 되었어도, 고전 음악은 아 주 급격하게 대중성이 떨어져서 1960년대 말에서도 가졌던 문화적 반향을 거의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 미래의 대중 음악 형태들의 지성화는 유럽 고전 음악적 전통과의 융합과는 다른 형태를 가질 것이라고 상상해 본 다.

주석(괄호 안은 참고문헌}

1. Schaffner, Pink floyd, 15.
(Schaffner, Nicholas. Saucerful of Secrets: The Pink Floyd Odyssey.
New York: Harmony Books, 1991.)
2. 심지어 클럽 씬이 상당하게 쇠퇴한 후에도, 이 클럽에 주었던 계속된 숭 배는, 드러머 Bill Bruford에 따르면 "순수한 기쁨과 휴식"을 위해서, King Crimson이 1973년 2월만큼 늦게도 Marquee에서 공연했다는 사실로 부터 설명된다(Tamm, Fripp, 69 를 보라); 더구나, Van der Graaf Generator가 1978년에 발매된 그들의 고별 라이브 앨범을 녹음한 곳도 여기였다.
(Tamm, Eric. Robert Fripp: From King Crimson to Guitar Craft.
Boston: Faber and Faber, 1990.)
3. Jethro Tull과 포크 싱어 Roy Harper는 1968년 6월 29일에 첫 무료 하이 드 파크 콘써트에서 Pink Floyd를 위해 오프닝을 열었다. 또다른 전설적 인 하이드 파크 콘써트에서, King Crimson은 1969년 7월 5일에 65만명에 게 연주하면서, Rolling Stones를 위해 오프닝을 열었다.
4. Hedges, Yes, 110.
(Hedges, Dan. Yes: The Authorozed Biography. London: Sidgwick and Jackson, 1981.)
5. 가능한 한 정직하게도, 대처(Thatcher) 시대 동안, "블루 칼라" 직업과 "서비스 산업" 직업 (후자는 전통적으로 낮은 중류층의 범주) 사이의 차 이가 더욱 모호해짐에 따라, 이런 특성은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관련된 1945-1975년 기간 동안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6. David H. Fischer, Albion's Seed: Four British Folkways in Americ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236-46, 특히 243 7. 영국 락 문화에서 아트 스쿨의 역할에 대해 더 알기위해서, Simon Frith 와 Robert Horne의 Art inti Pop (New York: Methuen, 1987)를 보라.
(Frith, Sinon, and Robert Horne. Art into Pop. New York: Methuen, 1987.)
8. Ian McDonald, Peter Frame의 Rock Family Trees (New York: Quick Fox, 1979), 16 에서 인용.
(Frame, Peter. Rock Family Trees. New York: Quick Fox, 1979.)
9. Eric Gaer, "Emerson, Lake, and Palmer: A Force to Be Reckoned with,"
Downbeat 41 (May 9, 1974), 14.
10. Dick Heckstall-Smith, The Safest Place in the World (London: Quart et Books, 1989), 148, 150.
11. John Wetton, Tom Mulhern의 "John Wetton: Asia's Progressive Rock Bassist," Guitar Player 17 (January 1983), 39. 에서 인용.
12. "Emerson, Lake & Palmer: Welcome BackA Musical Biography,"
strand Home Video 8121, 1992.
13. Mulhern, "Wetton," 33.
(11과 같음)
14. Hedges, Yes, 15.
(4와 같음)
15. Janis Schact, Genesis (London: Proteus Books, 1984), 92.
16. Hedges, Yes, 100.
(4와 같음)
17. Joachim Berendt, The Jazz Book: From New Orleans to Rock and Free Jazz, trans. Dan Morgensern and Helmut and Barbara Bredigkeit (New York: Larrence Hill, 1975), 306.
18. Tamm, Fripp, 183.
(2와 같음)
19. Dominic Milano, "Keith Emerson," Contemporary Keyboard 6(September 1980), 20.
20. Andrew Jones, "Fish out of Water," Montreal Mirror (March 15-22), 90, reprinted in Pawn Hearts Newsletter (April 1990), 5.
21. Curtis, Rock Eras, 279.
(Curtis, Jim. Rock Eras: Interpretations of Music and Society, 1954-1984. Bowling Green, Ohio: Bowling Green State University Popular Press, 1987.)
22. Davin Seay는 그의 Stairway to Heaven에서, 1950년대의 흑인(Little Richard, Sam Cooke)과 백인(Elvis, Jerry Lee Lewis) 모두인 미국인 락 엔롤러들이 어떻게 "악마의 음악" R&B를 연주하기 위해 성령 강림절적이 고 복음적인 유산을 포기한 것에 대해 강한 죄책감으로 종종 괴로워했는 지를 주지했다. 그것은 세속적인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그들이 성공회적 인 유산을 포기했던 것애 대해 비슷한 죄책감을 느꼈던 영국 뮤지션들을 발견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Seay, Davin, with Mary Neely. Stairway to Heaven: The Spiritual Roots of Rock'n'Roll. New York: Ballantine Books, 1986.)
23. Chris Squire, Hedges, Yes, 15.에서 인용 (4와 같음)
24. Peter Gabriel, Gallo, Genesis, 14. 에서 인용 (Gallo, Armando. Genesis: I Know What I Like, Los Angeles: D.I.Y.
Press, 1980.)
25. Anderson, "The Fresh Fruit Interview, Part Two," 6.
26. James Lincoln Collier, The Making of Jazz: A Comprehensive History (Boston: Houghton Miflin, 1978), 409-10.
27. Riesman, "Listening to Popular Music," in On Record, ed. Frith and Goodwin, 9-10.

2. 팬들

(The Fans)

어느 정도의 두려움과 함께 이 절을 시작한다. 이건 그저 내가 전문적인 사회학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이십년은 통계적으로 정확한 프로그레시 브 락 팬들의 통계 연구를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믿는다. 누구나 팬들을 대표하는 집단을 인터뷰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이 아직도 가능한지 확신하 지도 않는다. Yes, ELP, Genesis, Pink Floyd 등의 현재 팬 클럽의 멤버들 은 이십년 전의 보통의 레코드 구매나 콘써트에 참석하던 팬과는 거의 확실 히 맞지 않다. 마찬가지로, 이들 밴드들의 현재 청중들의 몇 퍼센트가 새로 운지 (상대적으로 새로운-거의 지난 10년을 말함) 그리고 몇 퍼센트가 1970 -1976년 시기로 되돌아가는지를 결정하기는 불가능하지 않다 하더라도 어렵 다. 이런 의미로, 대략 1970-1976년의 프로그레시브 락에 대한 완전히 정확 한 민족학적(民族學的, ethnographic) 조사가 가능하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는 것을 미리 말해두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이 주제에 대한 어떤 빛을 던 져주리라 믿는 몇몇 관찰 사항들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몇번이나 언급했었던 것을 재강조해야만 한다. 1966년과 19 70년 또는 1971년 사이에서 프로그레시브 락의 뮤지션들과 청중들은 중요한 점들에서 비슷했다고 믿는다. 이 시기 동안, 프로그레시브 락은 여전히 지 역적으로 구분된 소문화의 음악이었으며, 이 소문화는 멤버들의 나이와 계 층적 혈통에 대해 본질적으로 동질적이었다. 뮤지션들과 같이, 청중들은 젊 었다(30세 이하). 그것은 잉글랜드 남동부를 특히 중심으로 했다. 그것의 사회 경제적인 배경은 확고한 중류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뮤지션들의 일 반적인 교육상의 배경들, 그리고 그러므로 고급 문화의 예술, 문학, 음악에 의 익숙함을 공유했다. 이 시기의 청중들과 공연자들 사이의 유일한 주요 차이점은 성(gender)을 포함한다. 청중들이 대충 같은 여성-남성 비율을 가 진 것처럼 보인 반면에, 공연자들은 압도적으로 남성이었다.

이 청중들이 뮤지션들과 통계학적으로만 비슷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형 무대에서 프로그레시브 락을 위한 모임을 제공했던 클럽과 약간 더 큰 장소에서 친밀한 방법으로 뮤지션들과 접촉했다. 심지어, 뮤지션들이 무대 위에 있는 이들이었을지라도 (하지만, "Spontaneous Underground" 씨리즈가 1966년에 런던의 Marquee 클럽에서 소개되었을 때, 공연자/청중 구분이 없 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유용하다), 뮤지션들은 "그들 중의 하나"였다.
단지 1960년대 후반의 대형 야외 페스티발들이 공연자/청중의 커다란 구분 이 닥칠런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던져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1968년의 한 청중이 Pink Floyd, Procol Harum, Nice, 또는 Soft Machine의 멤버와 개인 적으로 만났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하는 것이 아주 합당하다.

영국 히피들이 클럽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밴드들을 눈여겨 보지 않았을 시기에, 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다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어떤 이의 아파트에서 마리화나를 피면서, 그들이 좋아하는 앨범들을 황홀하게 듣는 것이다. Paul Willis는 영국 반항 문화에 관한 원조격인 민족학적인 연구 Profane Culture에서 히피들에게 있어서의 이런 활동의 중요성을 아주 강조했다.[원주 28] 그런 청취 활동은 일반적으 로 작은 그룹들에서 일어나는 것 같고, 이는 다른 중류층의 "탈락된(drop- out)" 소문화, 즉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의 소문화에서 연주되었던 장소 음악 (place music)을 다시 연상시킨다.

Willis의 연구에서 매우 유력하게 나타난 것은 영국 히피들이 말 그대로 음악 기반의 소문화였다는 것이다. 즉, 레코드와 생음악을 듣는 이들 청중 들에게, 음악은 일반적으로 춤추거나 다른 활동을 위한 부수물이 아니었다 는 것이다. 그것은 주된 활동이었고, 음악은 어떤 대화가 일어나는가에 대 한 발판으로 주로 작용했다. Robert Wyatt이 지적했듯이, 청중들의 환각제 들과 결과적으로 청취 습관에 대한 선호는 반항문화 이전의 대중 음악에서 가능했었을 기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통해 아이디어들을 펼치도록 뮤지 션들을 고무시킴으로써, 프로그레시브 락의 음악적 발전에 깊은 자극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못된다.

[1960년대 후반의 Soft Machine에서]가장 큰 영향들 중 하나는 UFO [클럽 ]에서의 분위기였죠. 사교적인 장치는 일반적인 대용품으로 된 동양풍을 유지하면서 당신은 청중을 앉아 있도록 했을 겁니다....앉은 청중에 의해 만들어진 분위기는 인도 고전 음악에서처럼 곡조의 길고 부드러운 윙윙거 리는(droning) 도입부를 연주하기에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죠. 서서 움직 이길 기다리며 맥주를 들이키는 사람들로 가득찬 방이라면 그건 아주 불 가능하고, 윙윙거리면서 시작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가득찬 마루라면, 심지어 듣고 있는 소수에게는 바닥에서 일어서도록 하 는 첫번째 곡조를 위해 반시간 동안 기다리는 일이 매우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굉장한 영향이었거나, 또는 취향에 따라 끔찍한 것이었습 니다. 하지만, 그건 뮤지션들이 연주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죠.[원주 29]

음악과 그것의 사회적 역할 사이의 분명한 관계 때문에 히피 소문화와 초기 프로그레시브 락 간의 -2장에서 제공했던- 수 많은 뚜렷한 상응 관계들을 끌어내기는 매우 쉽다.

하지만, 1970-1972년은 연속된 중요하고 영원한 변화들로 이러한 상황을 가져왔다. 먼저, 주요한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이 미국으로 밀어닥쳤다.
미국은 영국보다 훨씬 더 큰 잠재적인 청중을 가졌(고 또 가진)다. 이것은 아주 커진 규모의 콘써트 투어들의 가능성을 만들 뿐만 아니라, 엄청나게 확장된 레코드 구매 고객들을 생성한다. 레코드 회사들이 가장 이익이 되는 길은 ELP, Yes, Pink Floyd, Jethro Tull, 그리고 Moddy Blues와 같은 밴드 들이 일년에 거의 한번 앨범을 발매하고, 이어서 미국에서의 긴 판매 투어 가 뒤따르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새로운 형태는 두가지 주된 효과를 가졌다. 첫째, 그것은 주요한 영 국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을 그들이 유래된 지역적인 소문화로부터 효과적 으로 제외시켰다. 그들은 자주 영국에서 공연하지 않은 채 몇 달 (Pink Floyd나 Led Zeppelin의 경우에는 때때로 몇 년)을 보냈다. 둘째, 프로모터 들이 이들 밴드들이 북미의 큰 무대장소나 스타디움을 쉽게 채울 수 있을 거라는 기쁨을 발견했으므로, 그것은 클럽 순회를 쇠퇴시켰다. 그 결과로, 클럽 시절의 친밀해던 연주자/청중 관계는 과거의 것이 되었다. 정말로 큰 무대에서 팬들은 심지어 연주자를 보기도 어렵게 꽉 찼고, 1974년에는 보통 팬은 Keith Emerson, Robert Fripp 혹은 Roger Waters를 접촉하는 것에 대 한 환상이 없어졌다. 1970년대 동안 락 씬의 그러한 중심적인 국면이었던 거대한 연주자/청중의 양분은 인정된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몇가지 재미있는 질문이 생긴다. 첫째, 왜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은 미국에서 그렇게 잘해냈던가? Lester Bangs, Dave Marsh,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것은 모든 레코드 회사 광고였다고 주장했다.[원주 30] 그러나, 광고가 1-2 년 동안 연주자를 지탱시키는 반면, 주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들의 풍으로 뮤지션들이 앨범 챠트에서 5, 6, 또는 심지어 7년 기간 내내 반복적으로 탑 텐(또는 1위)에 도달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음악 을 아주 많이 중요시한 일단의 미국 팬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가정해야 만 한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였으며, 그들이 1966-70년 기간의 영국 팬과 공통적으로 공유한 것은 무었이었을까?

첫째, 미국에서의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 대중에게 분명한 지역적인 동일 성이 있었다고 생각한다.(전체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락은 일단 영국에서 미 국으로 그리고 클럽에서 스타디움으로 옮겨감에 따라 소문화적 스타일이 되 기를 멈추었다고 생각되어지므로, "소문화"라는 용어를 더이상 사용하지 않 을 것이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그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잘 해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중서부, 북동부와 중부 대서양 지역들에서, 그리고 서 해안 지역에서는 보다 덜 인기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관찰은 세 가지 전제 를 기초로 한다. 첫째, 1970년대 초의 미국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 - 그때 는 종종 매우 제한된 지역의 바깥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작품은 현 재는 단지 특별한 레이블들이 재발매하고 있다 - 은 거의 대부분 이 지역들 출신이다. 둘째, 본래 프로그레시브 락/헤비 메탈 퓨전을 포함하는 미국 스 타디움 락 스타일은 1970년대 중반 동안 북동부, 중서부, 그리고 서해안으 로부터 나타났다.(다음 장에서 더욱 자세히 이들 두 요소들을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1970년대로부터의 지역적(국가적에 반대로)인 특성의 인기 투표를 조사함에 있어서, 중서부에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의 인기는 특히 분 명했다. 예를 들면, 1978년이나 늦게 당시 주요 락 방송국이었던 WWWW에 의 해 디트로이트에서 시행된 투표에서 청취자들에게 그 방송국이 편집한 탑 106곡(WWWW는 106 FM이었다. 그 106 곡들은 당시 1978년 6월 4일에 틀었다)
의 리스트로부터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판명하라고 물었다. ELP는 20, 36, 53위에 기입되었다. Yes는 9, 33위였다. Pink Floyd는 21, 35위였다.
Moody Blues는 12, 28위였다. Jethro Tull은 13, 101위였다. 이들 다섯 밴 드들이 인상적이지 않은 숫자가 아닌 탑 50위에서 9개를 차지했다는 것을 유의하면 흥미롭다. Led Zeppelin의 두 개의 가장 잘 알려진 프로그레시브 서사시들인 "Stairway to Heaven"과 "Kashmir"가 각각 1, 5위를 차지했다 는 것은 또한 중요하다. 어떤 지역 투표에서는 아주 많은 일반화를 확실히 추정할 수 있는 반면에, 이들 지역들-특히 중서부-에서의 영국 프로그레시 브 락 스타일의 인기는 의심되어질 수 없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러면, 다음 질문은 왜 이 지역들에서 청취자들이 프로그레시브 락이 흥 미를 끌었을까?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대답할 수 있다고 느낀 다. 주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의 작품을 조사할 때, 고급 문화와의 관계 를 제외하고 내재된 영국 민족주의를 주목한다. 이것은 영국 민요, 성공회 합창 음악과 Holst와 Vaughan Williams와 같은 영국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음악에 대한 음악적 스타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의 명백히 빚지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커버 아트와 주제의 중세주의와 영국 민속에 대한 되풀이되 는 참조들에서도 분명하다. Genesis, Yes, King Crimson, Gentle Giant, Jethro Tull, Moody Blues, 심지어 Led Zeppelin에서 이런 저런 수준에서 이들 요소들을 볼 수 있다. D.W. Meinig에 의한 비평은 왜 프로그레시브 락 이 이들 세 지역들에서 특히 잘 받아들여졌는지를 이해하는 데 열쇠를 제공 한다. Jim Curtis는 "미국은 스스로를 세가지 상징적인 풍경-뉴 잉글랜드 마을, (1955영 7월 17일에 열었던) 디즈니랜드로 기억되는 중서부 메인 스 트리트,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변-과 동일시된다"고 말한 것으로 그를 인용 한다.[원주 32] Curtis는 "이들 풍경들 중 어느 것도 부유한 백인 앵글로- 색슨 신교도들(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s) 이외의 누군가를 적 응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 많은 미국 대중 문화를 만들었던 흑인, 유태인, 동유럽인, 산지인들은 이들 지역의 짜임새를 파괴한다."라는 데 주목하기를 계속했다.

뉴 앵글랜드 마을들과 중서부 메인 스트리트에서 많은 덜 부유한 WASP들이 있고 또 항상 있어왔다고 가정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마지막 비평의 이데 올로기적인 분열에 의해 빗나가게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이들이 미국의 대다수 WASP 지역들이라는 데 의심할 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북동부와 중서부의 영국적인 유산은 더욱 언급이 필요없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의 민족주의적 요소는 예를 들어 남동부보다는 이들 지역에서 훨씬 더 호의적 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놀랍지가 않다.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에서 백인 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면밀히 조사되고 있었을 때(미국 역사에서 처음으로),[원주 33] 환상과 신화의 비행과 교회 의식과 유사한 라이브 쇼들이 청중들-많은 이는 주류 크리스천 종파들로부터 벗어났다- 에 게 대리 종교를 제공했던 것처럼, 젊은 백인 청중에게 프로그레시브 락의 영국적 민족주의가 어떤 종류의 대리적인 민족적 동질감을 제공했다고 느낀 다. 반대로,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의 민족적인 요인들은 또한 흑인, 히스 패닉, 그리고 백인 인구가 언제나 WASP/북부 주류들과 구분된 문화로 정의 되었던 미국 남동부의 대다수를 위해 그 스타일이 가진 관심의 부족에 아마 기여했다.

처음에는 적어도 고등 교육받은 영국 소문화에 입각했던 프로그레시브 락 의 고급 문화와의 관계에 미국 청중들이 응할 수 있었던 이유를 궁금해할런 지 모른다. 미국 청중들은 1960년대 후반 동안 Bob Dylan, Paul Simon, Jim Morrison에 의해 대중 음악에서의 고급 문화와의 관련성에 이미 환호했다고 제안할 것이다. 이것은 그렇다 치고, 이들 뮤지션들은 고급 문화의 음악이 아닌 문학을 끌어왔다. 그러나, Emily Dickinson (Simon의 "For Emily, Wherever I May Find Her")으로부터 Antonin Artaud (또한 Huxley의 Doors of Perception을 말하는 것 같은 Doors의 "Break On Through")와 Marshall McLuhan (Dylan의 Highway 61 Revisited)에 이르는 모든 이로부터 끌어온 아이디어들에 노출되었던 청중들은 Bach, Musorgsky, 또는 특히 격심하게 간 Aaron Copland 와의 음악적 관련성들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 할 수 있다.

Landon Jones이 그의 저서 Great Expectations에서 지적했듯이, 프로그레 시브 락이 끈 청중을 포함한 베이비 붐 세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많이 교 육받았다.

우리가 나중에 세대 차이라고 불렀던 것은 처음에는 교육 차이였다. 1947 년과 1951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들의 85 퍼센트는 고등 학교를 마쳤으며, 그들 부모의 단지 38 퍼센트에 비교된다. 그들 중 반 이상이 칼리지로 갔고, 이는 그들 부모 시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비율이었다.
단지 그 이전이나 이후에 그렇게 많은 대학 졸업생을 배출한 세대가 없었 기 때문에, 베이비 붐 세대는 언제나 다른 세대들과 다르게 보였을 것이 다.[원주 34]

Jim Curtis는 "대학에 가려고 했던 그렇게 엄청난 수의 미국 아이들이 Beethoven을 좋아하도록 배울 필요는 없었다....[그러나] 그들은 고급 문화 에 대한 어떤 방어 자세를 잃어버렸다."라는 데 주목했다.[원주 35] 그들이 Musorgsky나 Stravinsky를 좋아하도록 배우지 못했을지라도, ELP 또는 Yes 에 의해 연주될 때 들어볼려고 했을 것이다. Lester Bangs와 같은 비평가들 이 그것을 싫어한 만큼, 잘 알려진 고전 음악곡들의 편곡을 포함했던 ELP의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과 같은 앨범들이 적어도 어떤 청취자들에게는 본래의 것을 탐구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의 미국인 대중들 중 대학교육을 받은 일부분만이 프로그레시브 락의 고급 문화의 음악에의 참고에 대해 공감한 (혹은 적어도 너그러운) 것은 아 니었다. 그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프로그레시브 락이 퍼뜨린 (Jim Curtis가 지적했듯이, 1970년대 영국 락을 그렇게 많이 보급했던 전체주의의 공포가 아마도 미국 대중들에게는 약간 더 낯설었다 하더라도[원주 36]) 히피 이데 올로기에도 또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하면,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의 미국인 대중들은 그 스타일이 발생된 영국 히피 소문화보다는 더 많은 비율의 블루 칼라 청취자 들을 가졌다는 것을 또한 의심할 수 없다.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의 대중들 의 이런 일부분은 헤비 메탈, 하드 락,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똑같이 자주 즐겼고, (그들 중 많은 이들이 Genesis나 Renaissance의 좀 더 부드러 운 사운드보다는 ELP와 King Crimson과 같은 더 하드락적인 프로그레시브 밴드들을 아마 선호했다 할지라도) 그 스타일들 간의 본질적인 구분을 하지 않았다. 이들 청취자들은 프로그레시브 락의 고전음악적인 인용과 고급 문 화의 참조들에 거의 관심이 없었(거나 아마 심지어 알지 못했)다. 그들은 Karn Evil 9, Close to the Edge, 또는 Thick as a Brick 의 가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고, 이 스타일의 좀 더 예쁜 요소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거의 공감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원주 37] 하지만, 프로 그레시브 락 취향의 대중들의 이런 일부분들이 매우 즐겼던 이 스타일의 두 가지 요소가 있었다. 첫번째는 기교(virtuosity)였다. 2장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프로그레시브 락과 헤비 메탈에서 독주 주자는 사회적인 제약들로부 터의 상징적인 탈출을 감안한 기교적 공로를 갖는 낭만적인 영웅, 대담한 개인주의자의 역할을 맡는다. 특히, 헤비 메탈 콘써트에서, 청중들은 종종 그들의 영웅에 "에어 기타"를 반주함으로써 리드 기타리스트의 기교를 대리 적으로 함께 나눴다.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의 대중들이 이런 일부분에게는, Keith Emerson의 기교가 J.S. Bach로부터 왔던지, T-Bone Walker로부터 왔 던지간에 차이가 없었다. 그의 기교에 대한 사실로 충분했다.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의 대중들의 이런 일부에게 중요했던 두번째 요소는 시각적인 구경거리(visual spectacle)였다. 3장에서 언급했듯이, 주요한 프 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은 일단 그들이 클럽으로부터 광장으로 이동함에 따라 청중의 관심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시각적인 소품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단순하게 무대에 서서 작품들을 연주하는 것은 500에서 1000 명의 청중들에게는 충분했으나, 스타디움의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연주자 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수 있는 50,000명의 청중들 앞에서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점차로 대담하게 독창적인 기술적 소품들:레이저 빛들, 드라이 아 이스 안개, 쏘는 피아노들, 자멸하는 모듈의 신서사이저들, 추락하는 비행 기들, 떠 있는 돼지들 등등의 일체가 나타났다. 이런 종류의 스테이지 쇼들 은 미국 특유의 것(디즈니랜드 등과의 유사점들이 명백하다는 점에서)이었 으며, 일반적인 경제적 부가 이런 규모의 구경거리를 있을 법한 문제로 만 들었을 때인 초기 1970년대의 산물인 것 같았다. 어쨋든, 이런 종류의 스테 이지 쇼는 같은 규모는 자주 아니었을지라도, 물론 1970년대의 다른 락 스 타일들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과 중반 사이에 많은 FM 방송국들이 채택했던 앨범 중심의 라디오(album-orinted radio, AOR) 형태는 그 시기에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 의 미국 대중들의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류의 형태는 1960년대 후반의 자유로운 형태의 "언더그라운드" FM 락 라디오를 Beatles/Dylan 시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고전" 락의 지속적인 선곡으로 대체되었다. 그러 므로 탑 40위 AM 라디오 형태와 함께 자유로운 형태의 방송국에서 틀었던 음악을 가져왔다. AOR이 가장 두드러지게 등장시켰던 1970년대 초의 스타일 들은 프로그레시브 락, 헤비 메탈, 하드 락, 그리고 어느 정도는 James Taylor, Elton John, 그리고 비슷한 연주자들의 싱어/송라이터 쟝르(이 스 타일은 AM 라디오에서 심지어 더 유행했을지라도) 였다. AOR을 통하여 프로 그레시브 락은 주도하는 헤비 메탈, 하드 락, 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들의 콘써트에 참석하는 것이 중요한 활동이었던 젊고, 거의 남자들인 미국 취향 대중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AOR을 통하여 훨씬 더 많이 여성이었을 그리고 아마도 더욱 대학 중심이었던 싱어/송라이터들의 팬들은, 심지어 그 들이 콘써트에 참석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프로그레시브 락 앨범들을 사도 록 유도되었다. AOR 라디오가 락 싱글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역설적으 로는 그 앨범의 숭배를 락의 주요한 매개체로 나타냈을지라도, 작은 모임과 친밀한 환경에서 앨범들을 청취하는 것은 1970년대의 미국 프로그레시브 락 청중들이 영국 히피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확고한 활동이었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특히 대학 캠퍼스(Will Straw는 1970년대 중반을 통해 지하 감옥, 용과 같은 판타지 게임들을 과다하게 등장시켰던 어떤 대학 소문화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제시했다[원주 38])에서, 어떤 소문화 적인 활동과 아마도 유대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대체로, 1970년대의 미국 에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의 성공은 얼마간의 카톨릭 성향을 가진 거대한 젊 은이 기반의 기호 대중에 의한 그 채택의 결과였다. 확실하게도, 프로그레 시브 락이 너무 예술인 척하는 것을 알아챈 어떤 헤비 메탈 팬들, 헤비 메 탈이 너무 단순하다고 알았던 어떤 프로그레시브 락 팬들(이들은 대신에 자 주 퓨전 쪽으로 끌렸었다), 그리고 두 스타일들을 싫어한 어떤 싱어/송라이 터 열광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대체로, AOR은 이들 모든 스타일들이 관련 정도가 제각각이었던 1970년대 동안 미국에서 젊은이 중심의 기호 대중을 만들어내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 대중의 부상이 나타내어졌다면, 그것의 쇠 퇴는 무엇인가? 1976-1977년의 펑크 락의 융성이 뮤지션들 자신에게 한 시 대가 변천해 가고 있다는 인식을 가져왔다고 생각되어지는 반면에, 사실은 프로그레시브 락이 1970년대 말에도 미국에서 (특히, 보수적인 중서부의 청 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했던 반면, 펑크는 미국에서 결코 인기가 없었 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동안 프로그레시브 락 취향 대중의 해체되고 있었던 데에는 다수의 다른 요인들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AOR의 침체, 그 쟝르의 거대한 스테이지 쇼들을 더욱 문제시되게 한 변화된 경제적 정세 (특히 높은 인플레이션), 음악적 스타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 자체의 침 체, 뉴 웨이브 같은 상업적으로 자랄 수 있는 포스트펑크의 부상, 그리고 아마도 프로그레시브 락에는 이상적으로 적합하지 않았던 새로운 음악적인 기술들의 부상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무엇보다도 그 쟝르 의 원동력과 같았던 히피 정신(hippie ethos)의 1976년과 1981년 쯤 사이의 일반적인 사망이 차츰 다가왔던 것이다. 이 문제를 마지막 장에서 훨씬 더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주석(괄호 안은 참고문헌}

28. Willis, Profane Culture, 83-85 (Willis, Paul. Profane Culture. London: Routledge an Kegan Paul, 1978.)
29. Robert Wyatt, King, Robert Wyatt, May 5, 1967로부터 인용 (King, Mike. Wrong Movements: A Robert Wyatt History. Wembley, UK: SAF Publishing, 1994.)
30. Bangs의 "Exposed: The Brutal Energy Atrocities of Emerson, Lake and Palmer," Creem 6(March 1974), 74-75, 78 을 보라.
31. D.W. Meinig, Jim Curtis, Rock Eras, 45.로부터 인용. David Fischer 의 Albion Seed는, 어떻게 영국 이민자들의 네 개의 구별된 집단들이 미 국의 네 개의 구별된 지역들의 문화적 역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증명하 는 동시에, 풍부하게 발전된 이런 확장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21, 6 과 같음)
32. Curtis, Rock Eras, 45.
(21과 같음)
33. Deena Weinstein은 헤비 메탈 주제들과 아트워크들로부터 북부 유렵 신 화의 요소들을 알았다. Weinstein, Heavy Metal, 288 and 289, n. 36.을 보라.
(Weinstein, Deena. Heavy Metal: A Cultural Sociology. New York: Macmillan, 1991.)
34. Landon Jones, Great Expectations: America and the Baby Boom Genera tion(New York: Coward, McCann, and Geoghegan, 1980), 87.
35. Curtis, Rock Eras, 173.
(21과 같음)
36. 상동, 264.
37. 1970년대의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과 행한 인터뷰들에서 반복해서 떠오른 이슈는 1960년대 후반의 영국 히피들을 황홀하게 했던 조용한 악 구들이 경과되는 동안, 미국 청중들의 경솔하고 산만한 태도에 대한 당 황함이었다. 예를 들어, Tamm, Fripp, 76; Bruford, When in Doubt, Roll, 89; Davis, The Led Zeppelin Saga, 199; Schaffner, Pink Floyd, 179; Barry Harrington, "Progressive Renaissance: Emerson, Lake, and Palmer's Reunion Leads Art Rock Rebirth" (unpublished interview with Keith Emerson), 5 들을 보라. 그런 악구가 경과되는 동안의 미국 청중들의 소란스러운 태도는 이들 청중들의 더욱 블루-칼라적인 본성의 표시인 것 같다. 이들 청중 구성원들 중 많은 이들은 유복한 영국 히피 들이 배운 방식대로 "올바른" 콘써트 홀 규범을 결코 배우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런 태도는 어쨌든 그들의 블루-칼라 배경에 대조적인 것이었 다.
(2; Bruford, Bill. When in Doubt, Roll. Cedar Grove, N.J.: Modern Drummer Publications,1988.; Davis, Stephen. The Hammer of the Gods: The Led Zeppelin Saga. New York: Ballantine Books, 1985.; 1)
38. Straw, "The Case of Heavy Metal," 107.
(Straw, Will. "Characterizing Rock Music Culture: The Case of Heavy Metal." In On Record, ed. Frith and Goodwin, 97-110.)
39. 예로, Eric Salzman의 Twentieth-century Music, 228 과 Robert P.
Morgan의 Twentieth-century Music(New York: W. W. Norton, 1991), 433.
을 보라.
(Salzman, Eric. Twentieth-century Music: An Introduction. 3. ed.
Englewood Cliffs, N.J.L Prentice-Hall, 1988.)

3. 고급 문화의 전복(顚覆) : 기보(記譜) 대 즉흥

(Subverting High Culture:Notation versus Improvisation)

1980년 이후의 20세기 예술 음악에 관한 책들에서 20세기 말의 클래시컬/ 파퓰러 퓨전으로서 프로그레시브 락-보통 미니멀리즘과 같은 장에서 -에 대 한 지면을 할애하는 주목할 만한 경항이 있었다. 이런 경향이 "예술" 혹은 "진지한" 음악의 좁게 한정된 범위 외의 음악에 관한 일단의 음악학자들에 게 증대되고 있는 인식를 나타내는 한, 그것은 건전하다. 새로운 "예술"과 "대중적인" 스타일들 간의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통하는 것만이 고전 음악 문화가 안으로 성장하고 무미건조하기보다는 건전하고 활발하도록 남게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인식을 신호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특별히 좋은 신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레시브 락을 고전 음악으로 간주하는 것은 실 수이다. 확실히, 프로그레시브 락은 고급 문화에 매료되었고, 고전 음악의 전통과 관련된 많은 작곡 기법들을 끌어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고급 문 화의 가장 기본적인 많은 학설들을 전복시켰다. 이것은 프로그레시브 락의 작곡 방법들에서보다 더 명확한 곳은 없다. 기보와 작곡 자체의 활동으로 향한 태도에서, 프로그레시브 락은 고전 음악과 급진적으로 다르다. 프로그 레시브 락이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 전통의 유산에 대해 신세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분명히 보여준다는 것은 이런 범주에서이다.

아마도 서양 예술 음악 전통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기보법의 막대한 신뢰 다. 이전에는 어느 정도의 제한된 즉흥이 지금 경우보다 이런 전통 안에서 더욱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사실인 반면에, 이 음악의 역사에서 전체적인 요지는 작곡가의 의도를 기보하는 -먼저 음높이(pitch)에 대해, 그 다음 리 듬에 대해, 그 다음 (특정한 부분에 요구되는 악기들이나 목소리 형태들의 내역을 통해) 음색들, 또 마지막으로 강약법(强弱法, dynamics), 분절(分節, articulation), 구절법(句節法, phrasing), 그리고 템포에 대해서- 항상 정확한 방법들을 추구한 거의 천년을 갖는다는 것이다.(기보가 빠르면 빠를 수록, 음높이와 리듬이 아닌 요소들을 이해하는 데 현대 연주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어림 짐작을 더욱 가질 것 같다.) 악보는 세계 음악 문화에 대 한 서양 예술 음악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의 원천, 즉 한 악곡에 대한 객관 적인 실재(實在)의 형상이다. 다르게 말하면, 악보는 연주자가 지리적으로 또는 연대기적으로 작곡가로부터 벗어났을지라도, 그 또는 그녀가 결과적인 사운드가 작곡가의 의도에 대략 부합한다는 확신을 갖고 작곡가의 지시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작곡가의 생각을 묘사한다. 기보 때 문에, 유럽 예술 음악 전통에서 곡은 그것의 개념과 어떤 하나의 공연으로 부터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며, 궁극적으로 작곡가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 다.

이 체계의 잇점-그것이 작곡가에게 그 또는 그녀의 창조의 모든 세부사항 이상으로 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통제 능력-은 또한 가장 부정적인 성질인, 곡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연주자와 청취자와 똑같은 중대한 역할을 부인하 는 경향에 책임이 있다. 기보되지 않은 음악에 대한 기보된 음악의 탁월함 이 점점 더 의문을 가지게 됨에 따라, 이런 경향은 우리의 하반세기에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지적되었다. Robert Fripp은 심포닉한 연주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유일한 사람은 경찰서장으로서의 지휘자와 수사요원들로서의 뮤지 션들과 함께 작곡가이다"라고 예전에 비꼬며 언급했다.[원주 40] 서양 음악 문화가 기보에 두었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졌던 첫번 째 작가인 Henry Pleasant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들과 같은 그런 구속[즉, 일종의 성서로서의 악보]이 주어질 때, 그 것은 진지한 뮤지션의 기술, 근면함, 그리고 인내, 때때로는 심지어 지성 에 대해 그가, 특히 연중내내 다양한 독선적인 지휘자들의 일상적인 감독 하에서 다소 같은 방법으로 다소 같은 음표들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뮤 지션보다 우둔한 사람이 아니라는 찬사이다.[원주 41]

반면에,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재즈, 블루스, R&B, 또는 락-은 재즈의 주 페이지(lead sheets)에서처럼 제한된 방법으로 기보될런지 모르지만, 기 보에 의존하지 않으며, 개개인의 해석을 위하여 다른 요소들을 열어 둔 채, 화음 진행들과 중요한 주제를 나타내어 준다. 특히, 블루스는 곡이 연주와 떼어내서 존재하지 않는-심지어, 존재할 수 없는- 쟝르이다. 블루스 연주자 는 매번 어떤 새로운 것을 생성해내기 위해 특정한 화성, 멜로디, 그리고 리듬 공식들을 끌어낸다. 한 연주와 다음과의 차이들는 연주자의 변덕 뿐만 이 아니라, 항상 변하는 청중들과의 상호 교감으로부터 생긴다. 그래서, 블 루스, 재즈, 그리고 다른 아프리칸-아메리칸 형식들은 연주자와 청취자를 막론하고 창조적인 경험을 나눌 기회를 같이 제공한다. 이것은 연주자들에 게 상대적으로 제한된 자기 표현을 허용하고, 청취자에게는 아무것도 허용 하지 않는 고전 음악과는 직접적으로 반대에 있다. 특별히 청취자에게, 고 전 음악은 크게는 서양 문화 전통:그것을 취하겨나 그것을 버려두는 것 과 아주 상당히 비슷하다.

확실히 대다수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 스타일들에서, 연주에서 연주까지 변하지 않을 개개의 곡에서 어떤 특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재즈에서, 한 곡의 "머리(head)"(즉, 그 곡의 연주를 통해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주 테 마)가 될 화음 진행들은 일정하게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되풀이되는 화음 진행은 일련의 선율적인 즉흥들의 기초를 맡을 것이고, 각각의 즉흥 연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어떤 화음 형태들은 다른 화음 형태들로 또한 대체 될런지도 모른다) 같은 곡의 두 연주는 또한 다른 조와 템포일런지도 모르 며, 다른 악기 편성을 사용할런지도 모른다. 강약법과 구절법과 같은 더욱 미묘한 음악적 요소들은 또한 연주할 때마다 변하도록 제한된다. 대중 노래 는 연주할 때마다 오히려 더 일정하지만, 심지어 여기서도 동반되는 것은 새롭게 연주될 때마다 화음적인 가창, 악기 편성, 템포, 그리고 리듬적인 윤곽에 대해 변할런지도 모른다. 짧게 말해서,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에서 이 경향은 주어진 곡의 재창조에서 연주자에게 훨씬 더 큰 역할을 주는 것 이었다. 연주자는 본질적으로 공동 창조자이고, 연주자와 청중 간의 협조는 청중에게도 또한 창조적인 역할을 제공한다.

락의 다른 형식들처럼, 프로그레시브 락은 기보된 음악이 아니다. 이 음 악의 기보된 번역판들이 나타났을지라도, 종종 밴드들 외부의 사람들에 의 해, 그 음악이 탄생된 이후에 한데 합쳐졌다. 오히려, 레코딩이 그 음의 원 본에 대한 기본적인 저장소이며, 심지어 거침없이 음악을 기보할 수 있었던 Keith Emerson과 같은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도 단지 고전 음악 앙상블 들과의 협연에서만 기보를 쓰는 경향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그레시브 락은 분명히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의 전 통 안에 있다. 반면에, 많은 프로그레시브 락에서의 복잡함은 대량의 즉흥 을 단념시키기 일쑤였고, 이 경향은 1960년대 말 이래로 한 밴드의 라이브 연주는 그 스튜디오 레코딩들을 재생하는 것이었다.[원주 42] 한 밴드가 어 떤 특정한 곡의 편곡을 일단 끝마치게 되면, 그들은 그것을 단단히 고집하 는 경향이 있고, 많은 부분들은 연주때마다 거의 음표대로 반복된다. 즉흥 은 보통 키보디스트, 기타리스트, 또는 다른 악기주자가 반복된 베이스 오 스티나토와/또는 화음 진행 위에서 으뜸 선을 즉흥하는 특정 부분들로 제한 되었다. 심지어 그러한 "즉흥된" 부분들도 종종 연주때마다 대단히 비슷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자유로운 형태의 즉흥이 프로그레시브 락 공동체에서의 투사들 (가장 두드러진 King Crimson의 Robert Fripp)을 가졌을지라도, 대체로 프 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이런 형태의 작곡에 대한 뚜렷한 불신감을 나타 냈고, 즉흥에 대한 불타는 관심을 가진 락 뮤지션들은 보통 재즈락으로 몰 렸다. Kerry Minnear(Gentle Giant)는 이렇게 부언하면서 공통의 태도를 반 영했다. "프리 폼(free form)은 제가 많은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 것이 행해질 때는 대단하지만, 정말로 만들어낸 5분에 상당하는 것을 기다 리기 위해 45분을 앉아있는 것은 쓸모없는 것 같습니다."[원주 43]

David Gilmour는 싸이키델릭 시기 동안 거의 즉흥적인 밴드로서 Pink Flo yd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청중 앞에서의 라이브를 살펴볼 때, 우리가 60년대와 70년대 이른 초기에 행했던 방식에서 그것을 올바로 바로 잡는 만큼 많은 실수를 한다. 많은 것이 끔찍했다." 라고 하였다.[원주 44] Keith Emerson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독주에서 독주까지 반복되는 "표지 들(landmarks)"을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 말하였다. "주제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들 표지들은 청중들과의 접촉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어떤 교제 방법을 준다."[원주 45] U.K.의 원래 라인업의 해산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Allan Holdsworth와 밴드의 나머지들의 즉흥에 대한 매우 다른 사고방식에 의해 촉진되었다. 키보디스트 Eddie Jobson은 "Allan은 특정한 부분들을 연주하도록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이었다. 그는 그저 항상 하는 모든 것을 즉흥하기를 좋아한다.
"라고 불평했다.[원주 46] U.K.의 다른 멤버들보다 훨씬 더 연속된 즉흥의 재즈 이념에 의해 영향받았던 Holdsworth는 "U.K.가 내게 원했던 바보스런 것 중의 하나는... 같은 독주들을 연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안, 아무것 도 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나의 라이브 솔로가 레코드의 것들 과 같게 소리날까봐 정말 걱정했다."라며 분개해했다.[원주 47] Jobson과 Holdsworth의 대립하는 관점들은 프로그레시브 락에서 즉흥과 자연적인 아 프리칸-아메리칸 유산과 연주때마다 본질적으로 같은 방식으로 곡을 재창조 해내는 유럽적인 사상 사이에서 존재하는 긴장을 명시한다.

많은 프로그레시브 락에서의 상대적으로 제한된 즉흥의 역할 때문에, 프 로그레시브 락 곡이 기보될 때, 그 곡이 적절히 기보되었고 중요한 부분들 이 삭제되지 않았으면(프로그레시브 락의 기보된 번역판들에서 결코 보기 드문 문제가 아니었다), 청취자는 보통 결과적인 악보를 레코딩 과/이나 곡 의 연주들과 결부시킬 수 있다. 하지만, 프로그레시브 락 (혹은 그 일에 관 한 한 사실상 1960년대 중반 이래로 대중 음악의 다른 어떤 쟝르)의 기보된 번역판들은 음색을 나타내기에는 슬프게도 부적절하다. 현존하는 기보 시스 템들은 사용되는 복잡한 전자 음색들을 전달하는 방법이 전혀 없다. 예를 들면, 같은 형의 전자 기타를 연주하는 두 기타리스트들은 그들이 다른 효 과 장치들 (즉, 플랜저에 반하여 코러스 유닛)을 사용한다면 완전히 다르게 소리날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같은 장치들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다른 증 폭 시스탬들을 사용한다면 다르게 소리날 것이다. 감지할 수 있는 음색 변 이가 없는 표준화된 어쿠스틱 악기들의 음색을 전달하도록 설계된 고전적인 기보는 이런 미묘함을 다룰 방법이 전혀 없다. 더구나, 대중 가수들이 종종 여러 악구에서 만드는 보컬 음색화나, 기타리스트들(더욱 드물게는 전자 키 보디스트들)에 의해 자주 사용되는 글리산도(glissando, 활주법, 손가락 하 나로 피아노의 건반이나 현악기의 현을 급속히 훑는 연주법)들과 포르타멘 토(portamento, 성악/현악에서 한음에서 다른 음으로 부드럽게 넘어가는 청 법/주법)들에서의 미묘한 변화들을 잡기 위해서, 전통적인 기보를 이용하는 좋은 방법이 없다. 완전하게 기보된 악보들에 의해 제한된 표현의 자유를 가지기를 보통 싫어하는 대중적인 뮤지션들은 이런 문제들을 또한 알고 있 다. 그것은 왜 그들 중 그렇게 소수만이 고전적인 기보에 정통하는 것을 없 어서는 안 될 기술로 생각하는지에 대한 또다른 이유이다.

기보에의 의존성의 결핍은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이 고전음악 뮤지션 들에 비해 작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다소 다른 견해를 취하게 했다. 이런 경향은 한 사람이 주어진 곡의 모든 음악적인 측면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이 지배적인 고전 음악의 관습에 반해, 많은 락 밴드들-그리고, 프로그레시브 락도 예외는 아니다-에 의한 곡들은 몇몇, 혹은 아마도 모든 그룹 멤버들에 의해 공동으로 쓰여지는 경향에 대한 사실에 의해 촉진된다. 많은 프로그레 시브 락 밴드들은 멤버들이 거의 같은 창조적인 통제력을 가지고 다소 민주 적이었으며, 곡들은 다른 맴버들의 생각들을 결합하여 나뉘어졌다.[원주 48] Robert Fripp은 이런 협력 과정이 어떻게 King Crimson의 "21st- century Schiziod Man"의 탄생에 이뤄졌는지를 묘사한다:"첫번째 몇 음표들 다~~-다-다-다~-다~-다~~는 Greg Lake에 의한 것이었고, 도입부의 나머 지는 Ian McDonald의 생각이었고, 나는 연주 부분의 시작에서의 리프를 생 각해냈고, Michael Giles는 우리가 모두 매우 빠른 부분에서 연주의 끝까지 유니즌으로 연주하자고 제안했다."[원주 49]

비슷한 과정은 Pink Floyd의 긴 "Echoes"의 창작 중에 보여진다. 밴드의 드러머인 Nick Mason은 언급했다.

우리들은 1월달[1971년]을 위해서 스튜디오를 예약했고, 1월 내내 가서 연주했다. 누군가가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종류의 대략의 생각을 가진 아 무 때나 우리는 그것을 적어두었을 것이다...1월의 끝에 가서 우리는 다 시 들었고 때때로는 상호 연관되기도 하고 때때로는 그렇지 않은 36개의 다른 박자와 곡들을 얻었다. "Echoes"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원주 50]

Mason의 설명은 더 이른, 전자음악 이전의 시기에 작곡가의 스케치북이 담 당했던 역할을 취하며, 스튜디오가 1960년대 후반의 대중 음악에서 본질적 인 작곡 장치가 되었던 정도를 밝혀준다. 그는 또한 몇몇 개개인의 특질을 끌어낸, 여전히 부분의 합보다 더 큰 "그룹 사운드"를 밴드들이 열심히 만 드는 방법을 강조한다.

"Schizoid Man"과 "Echoes"는 몇몇 뮤지션들이 대규모의 곡으로 형성되어 지는 새롭게 착상된 음악적 생각들에 기여하는 방식의 예들이다. 평소에, 뮤지션들은 이미 썼던 미사용된 곡들을 해체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 하기 위해 몇몇 원천들로부터 가장 좋은 테마의 생각들을 함께 융합할 것이 다. Dan Hedges는 서술하길, Yes의 Close to the Edge의 코러스는

[기타리스트] Steve Howe가 몇년전에 정리했던 "부분적으로는 그 해의 가 장 긴 날에 관한" 같은 이름의 곡으로부터 이용되어졌다. Howe는 말하기 를, "[주 보컬리스트] Jon [Anderson]과 제가 같이 쓰게 되었을 때, 우리 는 각각 다른 부분들에 기여했고, 그 코러스는 Jon의 노래, "Total Mass Retain."과 가장 잘 맞았습니다...당신이 Yes를 위해 쓰고 있을 때, 이러 한 것들에 매달리는 완전 무결함은 사라집니다. 삽입 악절(lick)이 적당 하다면, 그걸 사용합니다."[원주 51]

모든 사람이 거의 같은 창의적인 입력 정보를 가지고 있는 밴드들에서는, 작곡의 최종적인 형태에 대한 논의가 격심할 수 있고, 종종 최후의 결과에 아무도 완전히 만족하지 않았다. 드러머 Bill Bruford는 U.K.와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앨범 U.K.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줄거리에 대한 최소한의 공통된 이해만 을 가지고, 네 작가들이 같은 소설을 동시에 쓸려고 하는 것과 약간 비슷 했다. 작가 2와 3은 여태까지 어떤 것도 좋아하는 것 같지 않고 반대하지 않는 작가 1을 가정해서, 책의 중반에서는 좋게 처리한다. 한편, 제목을 좋아하는 작가 4는 그의 대단원이 말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한, 중반부의 작가 2와 3의 견해를 그저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방식의 음악 작법은 고 되고 지치게 하고 값비싼 것이다.[원주 52]

뮤지션들이 그들의 생각들이 소홀히 취급당한다고 느낀 밴드를 떠난다는 것 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Peter Gabriel은 Genesis를 떠나는 것에 대해 나타냈던 이유들 중의 하나는 "청각적 및 시각적 이미지들의 사용은 우리가 행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하도록 개발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대규 모로는 하나의 분명하고 일관된 방향이 필요한데, 우리의 유사-민주적인 위 원회 체제에서는 제공할 수 없다."[원주 53]

이런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서 어떤 밴드들은 결코 처음부터 민주적이지는 아니었거나, 결국은 한 멤버가 주요한 작곡 감독을 맡도록 허용한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하지만 심지어 여기서도 작곡가는 고전음악 작곡가들의 방식 대로 작곡의 모든 세부사항들을 통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화음 진 행, 보컬 멜로디 라인들, 그리고 다른 중요한 주제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 이고, 여전히 악기 주자들이 제안된 구조 안에서 그들 자신의 부분들을 만 들어내기를 기대할 것이다. Eric Tamm은 Robert Fripp이 1970년의 Lizard LP 앨범 시기에 King Crimson의 주요 작곡가가 되었을지라도, "레코드에서 연주하는 모든 사람은 그 음악의 창조에 몫을 했다. 그것은 Fripp이 Zappa 처럼 모든 최종 음표와 표현의 뉘앙스를 쓰지는 않았고, 오히려 주어진 곡 에 맞다고 그가 생각한 약간 즉흥된 악구들의 형태를 주어진 연주자들로부 터 절충하려고 노력했다" 라고 지적한다.[원주 54]

ELP의 Keith Emerson은 비슷한 말로 "Abaddon's Bolero"의 기원을 설명한 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이 작은 멜로디를 끄집어냈고, 그걸 테입으로 보존했 습니다. 그걸 몇번 들은 후에 오버더빙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무 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으로 늘어난 곡으로서는 완벽한 것이라고 느꼈습니 다. 나는 그것을 Greg [Lake]와 Carl [Palmer]에게 보여줬고 우리는 몇번 이나 연주했습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말했고, 그 래서 신서사이저에 프로그램된 작은 플륫 소리의 멜로디를 연주하는 나와 함께 바로 시작했죠. 우리가 테마를 반복할 때마다, 나는 어떤 걸 추가하 고, Greg도 추가하고, Carl도 그의 드럼으로 더 많은 사운드를 추가합니 다... 우리는 그 사운드를 만들어내기를 그저 계속하고, 그 곡이 정점에 도달한 때에 거의 본능적으로 알았죠. 나는 Greg와 Carl을 바라봤고, 우 리는 정확히 함께 중단했습니다.[원주 55]

작곡 과정에 대한 또다른 비슷한 묘사는 Gentle Giant의 주요 송라이터들 중 한 명인 Kerry Minnear에 의해 주어졌다.

제가 그걸[곡] 쓰면, Gary Green에게 기타 부분을 주고 그것을 듣고, Ray [Shulman]에게 베이스 부분을, John Weathers로부터 드럼의 올바른 느낌 을 얻으려고 하고, 마지막까지 보컬은 남겨둡니다. 그건 보통 영감이라는 것을 재생산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몇번의 연주 후에, 제가 그들에게 준 것에 그들 자신이 약간의 꾸밈을 더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우리는 제 가 의도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것으로 끝마칩니다. 그러나, 그건 좋습니 다. 왜냐면, 우리는 그룹이고 오케스트라가 아니기 때문이지요.[원주 56]

그러면, 프로그레시브 락의 작곡 과정의 궁극적인 사회적 중요성은 무엇 인가? 필자는 이 스타일의 고전음악/락 퓨전의 진정한 목적이 "명성있는 논문을 참조하고 그러므로 반영된 영광을 입는 것" 이라는 Robert Walser의 견해에는 확실히 동의하지 않는다.[원주 57] 이런 비평은 적어도 Walser에 게는 대중적인 스타일과 고전적인 스타일들의 어떤 융합이 정의상 "헛되고", "믿을만하지 않고", "엘리트적"이라는 "일반적으로 인정받은" 비판적 입장 의 특색없는 무비판적인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장에서 이런 견해에 숨은 가정들을 조사할 것이다. 우선은, 그 견해 자체의 상대적인 장점들을 잠시 다룰 것이다. John Street은 그의 Rebel Rock에서 적당히 표준적으로 이를 들추어내고 있다.[원주 58] 그는 이 음악을 "엘리트주의"와 "전통주의"
로 경시하고, 뮤지션들이 "엘리트"로의 승인을 추구했다는 표준적인 비난을 한다. 이런 논쟁의 취약함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엘리트"는 결코 정확하게 판명되지 않는다. 또한, Keith Emerson, Robert Fripp, 혹은 Peter Gabriel 이 왜 그러한 승인을 추구했을지가 설명되지도 않는다.(Street는 그 "엘리 트"-학구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하고-가 Emerson이 해몬드 오르간에 칼 을 꽂는 방식에 열광했다고 정말로 믿을까?) 둘째, 또 미심쩍게도, Street 의 평가는 음악 스타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과 서화적/정신적/미학적 운 동으로서 반항문화 간의 명백한 관계에 대한 무지를 보여준다. 그는 그 스 타일이 반항문화로부터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뮤지션들, 레코드 회사 경영 진, 그리고 학교의 더러운 연합에 의해 반항문화에 편승했다는 주장을 시도 한다.(이 주장에 내재된 "음모의 요소"가 심지어 가장 잘 속는 믿음을 강요 한다는 것은 염려하지 말자)[원주 59]

음악 스타일로서의 프로그레시브 락이 어떻게 반항문화와의 관계와 세계 관으로부터 분명히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세 가지 예로도 충분할 것이다. 첫 째, Street은 히피들의 새롭고 마약에 의해 이끌린 지각이 이전의 대중 음 악 스타일들에서 관습적이었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더욱 복잡한 형식적인 방법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전적인 형식들이 반 항문화적인 뮤지션들이 일하도록 하는 논리적인 모델을 제공했던가? 둘째, 그는 "프로그레시브 락이 청중들이 춤추거나 한쪽 귀로 흘려 듣을 것으로 여겨지는 조롱당하는 팝보다 한층 더 청중들로부터의 수동성을 조장한다"고 불평한다.[원주 60] 게다가, Street은 무엇이 "수동성"을 구성하는지의 문 제에 바란다. "내적 세계"의 개발을 강조하는 반항 문화에서는, 춤은 라이 트 쇼를 동반하여 음악을 열심히 듣는 것보다는 더 "수동적"이었는데, 춤이 단지 신체를 필요로 하는 반면, 후자는 정신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Street 은 히피들이 그들의 음악을 "머리의 음악(head music)"이라고 까닭없이 부 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은 Paul Willis가 그의 Profane Culture에서 상당히 깊게 차지한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Street은 마약 사용과 음악 청취 둘 다 히피들을 위한 의식 적인 활동이 되었던 정도를 깊이 알지는 못한 것 같다. 그들에게 절망적으 로 지루하고 인공적인 세상처럼 보였던 것에서 어떤 종류의 사회적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깊이를 창조하기 위한 노력으로, 히피들이 그들의 문명적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고 민속 음악과 종교 음악으로부터 "전통적인" 요소를 끌어내었을 것이 특히 놀라운가? 어떤 이들은 Street에 의해 윤곽이 잡힌 입장에 집착하길 계속하리라고 이해하는 반면, 프로그레시브 락의 "엘리트 적"이고 "전통적"인 요소들은 과거의 비평가들에 의해 자주 주어졌던 단지 일차원적인 해석이 아닌 다양한 수준에서의 해석으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할 가장 알맞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프로그레시브 락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나 자신의 해석은 Street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음악적 작곡에 대한 접근법에서, 프로그레 시브 락은 많은 문화적 대립들: 고급 및 저급 문화, 유럽 및 아프리칸-아메 리칸 창조 이념들이 화해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최 고의 프로그레시브 락에서는, 이러한 가치들을 균형잡으려 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긴장감을 느낀다. 고전 음악의 지성화 또는 락의 자유로운 에너지 가 우세하게 될 때, 중급의 고전 음악 또는 늘어진 비활동적인 락이 되면서, 긴장감은 사라지고 음악은 그 힘을 잃는다.

그러나, 최고의 프로그레시브 락은 진정한 third-stream(재즈와 클래식을 융합한) 음악이다. 확실히,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에 의한 고전적인 악 기 편성의 적용을 락/팝 구조 위에서의 단순히 피상적인 고전적인 요소의 치장으로 볼 수 있다. 반면에, 프로그레시브 락의 형식적인 방식들은 두 뚜 렷한 음악 전통으로부터 이끈 음악적 재료들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방법들을 혼합한다. 프로그레시브 락은 철저히 그룹 작곡, 즉흥(혹은 적어도 하나의 곡의 어떤 면들을 각각의 연주에서 다르게 이해하는 연주자의 권리), 그리 고 기보에의 의존성에 대한 일반적인 결핍과 같은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 개념들의 토대 위에 있다. 하지만, 동시에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연 가곡(song cycle)과 다악장 조곡과 같은 유럽의 계획적인 형식들의 본질을 철저히 흡수했고, 이 점은 간과될 수 없다.

Andrew Chester는 유럽과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 간의 주요한 음악적 차 이는 구조의 범주에 있다고 주장했다.[원주 61] 그는 고전 음악을 공간과 시간을 통해 거대한, 복잡한 구조를 형성하도록 결합하는 기본적 음악 원소 들을 가진 "외연적인(extensional) 것"으로 설명했다. 반면에, 그는 블루스 와 같은 아프리칸-아메리칸 형식들을 "내포적인(intensional) 것"으로 설명 했다. "즉, 기본적인 음악 단위들은...단순한 요소들로서의 공간과 시간을 통해 복잡한 구조로 결합되지는 않는다. 단순한 실재(實在)는 멜로디, 화성, 박자의 매개변수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인 반면에, 복잡한 것은 기본적 음표 들의 조바꿈(轉調, modulation)와 기본 박자의 변화에 의해 세워진다." 는 것이다.[원주 62] Chester가 1970년에 외연적/내포적 양분법을 전개했을 때 프로그레시브 락은 여전히 유아적 단계에 있었을 지라도, 가장 심오한 싸이 키델릭 밴드들(그는 예를 들어 Jefferson Airplane과 원래 Soft Machine을 인용했다)의 음악은 "내포적"인 방법들보다 "외연적"인 방법들에 더 의존했 다는 것을 그는 이미 인식했다. 프로그레시브 락 스타일이 원숙해지면서, 고전 음악의 구조적 방법들에 대한 신세는 줄곧 더 단언되어졌다.

어떤 정도에서 프로그레시브 락 뮤지션들은 고급 문화의 음악을 적용함으 로써 그들의 중류층 유산을 축복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만 큼 중요한 것은 그들이 고급 문화의 많은 중심 학설들을 전복시킨 방법이며, 특히 아프리칸-아메리칸 음악 개념들의 흡수를 통해서이다. 결국, 프로그레 시브 락은, 이전에 락 또는 고전 음악에서 결코 듣지 못했던 새로운 전체성 을 낳았다. 여기에 그것의 궁극적인 성공, 그리고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 동안 그것의 음악적 및 사회적 생명력의 근원이 있다.

주석(괄호 안은 참고문헌}

40. Robert Fripp, Tom Mulhern, "Robert Fripp on the Discipline of Craft and Art," 96. 에서 인용.
(Mulhern, Tom. "Robert Fripp on the Discipline of Craft and Art,"
Guitar Player 20 (January 1986).)
41. Pleasants, Serious Musicand All That Jazz, 79.
(Pleasants, Henry. Serious MusicAnd All That Jazz, New York:Simon and Schuster, 1969.)
42. Jim Curtis는 결코 라이브로 연주되지 않았던 Beatles의 Sergeant Pepper에 의해 개시된 이런 경향을 알았다. Rock Eras, 186, 193을 보라.
(21과 같음)
43. Kerry Minnear, Milano, "Kerry Minnear," 45.에서 인용 (Milano, Dominic. "Kerry Minnear: Keyboardist/Composer for Gentle Giant," Contemporary Keyboard 2(May/June 1976).)
44. David Gilmour, Resnicoff, "David Gilmour's Pink Floyd," 57.에서 인 용.
(Resnicoff, Mat. "David Gilmour's Pink Floyd." Musician Magazine (August 1992).)
45. Keith Emerson, Milano, "Keith Emerson," Comtenporary Keyboard 3, 52.에서 인용.
(19와 같음)
46. Eddie Jobson, Milano, "Eddie Jobson of U.K.," 53.에서 인용.
(Milano, Dominic. "Eddie Jobson of U.K." Contemporary Keyboard 5 (March 1979).)
47. Allan Holdsworth, Tom Mulhern, "Allan Holdsworth: British Free- form Progressive Rocker," Guitar Player 14 (December 1980), 20. 에 서 인용.
48. 사회적인 단위로서 락 밴드의 더욱 일반적인 면들을 말하려고 하는 의 도는 아니다. - 이 주제에 대한 훌륭한 취급은 Deena Weinstein의 Heavy Metal: A Cultural Sociology, 69-75에서 찾을 수 있고, 내가 거의 첨가 할 것이 없다.
(33과 같음)
49. Robert Fripp, Tamm, Fripp, 34.에서 인용.
(2와 같음)
50. Nick Mason, Miles, Pink Floyd, November 1971. 에서 인용.
(Miles. Pink Floyd: A Visual Doumentary by Miles. New York: Omnibus Press, 1980.)
51. Hedges, Yes, 68-69.
(4와 같음)
52. Bill Bruford, When in Doubt, Roll!, 39.
(37의 2번째와 같음)
53. Peter Gabriel, Gallo, Genesis, 70.에서 인용.
(24와 같음)
54. Tamm, Fripp, 53-54.
(2와 같음)
55. Keith Emerson, Pethel, "Emerson," 55-56.에서 인용.
(Pethel, Blair. "Keith Emerson: The Emegence an Growh of Style."
D.M.A. Paper, Johns Hopkins University, 1987.)
56. Kerry Minnear, Milano, "Kerry Minnear," 45.에서 인용.
(43과 같음)
57. Walser, Running with the Devil, 104.
(Walser, Robert. Running with the Devil: Power, Gender, and Madness in Heavy Metal Music. Hanover, N.H.: Wesleyan University Press, 1993.)
58. John Street, Rebel Rock: The Politics of Popular Music (New York: Basil Blackwell, 1986), 190-92.
59. 적절한 비평은 다음과 같다: "뮤지션들은 산업의 축복과 함께 대중 음 악의 의미를 바꿀려고 시도했다" (상동, 190). 청중들은 이것에 대해 아 무런 말도 없었던가? 그들은 Street이 밝히는 이 과정의 정말로 단지 수동적인, 무언의 구경꾼이었나? 이런 "시도"(음모의 어투를 다시 주의 하라)가 반항문화 또는 히피 이후로 확대된 가치들 또는 정체성과 관련 이 없다면, 어떻게 이들 밴드들이 6,7,8년 기간 이상으로 그들의 인기를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60. 상동, 192.
61. Andrew Chester, "Second Thoughts on a Rock Aesthetic: The Band,"
in On Record, ed. Frith and Goodwin, 315-19.
62. 상동,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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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집일: 2004-3-18 12:17 am (변경사항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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